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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암 Kim, No Am

최영욱 작가론 - 달항아리와 해석된 이미지


김노암(미술평론가)


우리는 특별한 사건(시간과 장소)을 통해 사람의 마음, 감정, 정서는 일상생활을 견디는 동안 엄청나게 많은 충격과 갈등 속에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한다. 그러한 특별한 장소와 시간이란 일상의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예술가들이 오랫동안 노력하고 모색해온 미적 감수성을 통로로 실존의 문제를 관통하는 문제와 닿아 있다.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는 그런 점에서 매우 일관된 주제의식을 보여주며, 이론의 여지없이 의미 있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1 시인 김기림은 ‘시는 딩구는 단어’라고 선언했다. 둥근 달항아리가 딩군다. 달항아리는 시다. 수필도 닮았다. 소설은 아니다. 과학은 더더욱 아니다. 달항아리는 그림이지만 시이자 수필이다. 시인 호르헤 보르헤스가 구상한 알랩을 떠올려 보면, 알렙은 작은 원형 구슬이지만 그 구슬안에는 세계 전체가 들어있다. 가장 작은 것에 가장 큰 것이 들어 있는 역설. 이후 많은 포스트모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알렙 보다 앞서 달항아리에 우주가 담겨있다. 비의(秘意)를 품은 달빛을 반영하는 빙열. 달항아리가 우리에게 주는 심상은 매혹한다.

항아리 표면에는 독특한 질감 또는 물질적 속성과 함께 마치 우주공간이나 도원향의 이상적 산수(山水)가 펼쳐진다. 미세한 이미지의 떨림이 색면회화를 연상시키며 표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둥근 형태가 복잡하지 않은 가장 단순한 구성을 보여주며 어디로 보든 간에 동일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달항아리는 너무나 인간적인 형상이다. 달항아리는 원을 닮았지만 원을 비껴난다. 달항아리는 둥글지만 원은 아니다. 원은 가장 완성된 도형이지만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원은 인간의 문화적 현실에서는 관념과 이론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달항아리는 이곳 저곳 조금씩 일그러져 있다. 완전한 균형과 조형미란 환타지다. 사람은 환타지와 환타지 밖을 모두 걸쳐 존재한다. 이곳에 온전히 속하지도 않으며 저속에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 경계인이란 굳이 실존주의를 떠올리지 않아도 지상을 거니는 인간은 모두 그에 속한다. 현대회화가 실존주의의 영향하에 새로운 미적 지평선을 향해 진일보하였다하더라도 현대 미술의 경이로운 모험은 실존주의의 개념과 그 사유를 훌쩍 벗어난다. 작가 저마다의 체험에 따른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를 펼쳐낸다. 그러므로 현대미술의 이미지는 개념과 철학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개념과 철학은 미지의 영역을 담은 이미지의 도약과 모험을 위한 출발선으로서 그 역할에 머문다. 결코 현대미술은 교훈적이지도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메시지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 밖을 향한다.

달항아리라는 언어적 관념을 망각하더라도 작가의 모든 작품에서 작가만의 고유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너무나 분명해서 또 너무나 명쾌해서 전문가는 물론이고 미술을 전혀 모르는 관객도 최영욱 작가 고유의 스타일이자 시그니처로 감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지하고 이해하며, 그의 이미지를 보자마자 깊은 명상의 순간에 빠져들기까지 한다. 작가가 이러한 성공적인 몰입도를 성취한 데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는 것일까?

2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는 해석된 이미지이다. 결코 조선의 전통 도자기로서의 달항아리를 재현하려하지 않는다. 그의 이미지는 마크 로스코의 색면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색면 회화가 조형세계를 넘어서 인간의 내면, 심리와 마음의 세계로 진입한다. 심지어 영혼의 문제를 떠올리기까지 한다. 재현을 넘어서 조형요소들의 문제로 직결되고 마침내 개념의 운동으로 가득채워진 독특한 세계가 되어버린다.

내가 달항아리를 보지만 동시에 달항아리가 나를 보고 있다. 작가의 달항아리는 지시적 기호를 벗어나 하나의 개념이 되고 추상의 영역으로 상승한다. 마침내 달항아리의 형상을 사라지고 회화의 표면의 다양한 이미지와 에너지와 운동을 느끼게 한다. 마치 조선시대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있는 신비한 안개의 풍광이 작가의 달항아리의 표면에 중첩되어 보인다. 그것은 환영이며 현실의 시간이 아니다. 꿈과 현실, 생과 사, 나와 너, 과거 현재 미래가 용융된 시간이다. 한 곳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모든 곳에 편재하는 것과 같은 세계이다. 그렇게 최영욱 작가의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 또한 세속적 맥락을 탈피하고 완전한 개념이자 추상으로서 시간과 공간으로 다가간다.

미적 체험의 변화 가운데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시리즈는 일상과 세속의 욕망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한다. 날카롭게 긴장된 힘의 관계에 느슨한 이완과 여유의 자리를 마련한다. 작가의 달항아리 회화에는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백자로서의 현실 속 ‘달항아리’는 부재한다. 이미지는 감각과 정서의 복합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실재(Reality)를 지향한다. 이미지 그 자체로 존재하려 한다. 과거와 현재, 전통과 창조 사이의 가장 유기적인 구조를 획득한 이미지이다.

작품은 작가의 의식이 어떤 형태로건 투영되어 있다. 완결된 작품은 하나의 분명한 상징물이다. 동시에 독자적인 실재로 존재하게 된다. 현대 예술 작품의 해석과 이해가 점점더 어려워지는 이유이다. 현대 사회는 보다 더 복잡하고 불확실해졌고, 개인의 삶과 의식 또한 과거에 비할수 없이 복잡하고 섬세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와 욕망의 운동, 보다 높은 차원으로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려는 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3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시리즈는 밀레니엄을 전후에 처음 미술계에 등장한 이후(그것은 전조 없는 갑작스런 출현이다.) 이 구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다. 가장 단순한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이미 그것은 더 이상의 변화를 필요로하지 않는 완성된 형태이다. 형식이 내용의 표현이라면. 작가는 자기 고유의 스타일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미 90년대부터 다양한 조형실험을 통해 평면 이미지에 가장 풍부한 미적효과를 내는 것과 한국 미술의 현대성이 어떻게 미학적 문맥을 갖출 수 있는지 깊은 고민의 시기를 보내었다.

작가는 작은 선묘들이 마치 우주의 미립자들처럼 불교칙한 방향으로 운동하는 에너지의 형상을 둥근 형태 안에 가득 채워 놓는다. 무수한 입자들과 거대한 에너지의 궤적이 집요하게 추적되고 기록되어 2차원의 세계에서 다차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점증하는 복잡성을 획득해내고 있다.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 생성하는 빙열(氷裂)의 짧은 선들이 모여 달항아리의 표면을 채우면 미묘한 복잡성으로 깊은 다층의 표면들의 생성한다. 무수한 표면들의 집합이 하나의 선 안에 세계를 구성한다. 마치 수많은 별자리들, 은하들이 중첩되며 표면들의 생성과 소멸이 연쇄하는 운동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작가의 이미지 속에서 신비로운 항성(별)간 여행자처럼 감각하고 사유한다. 이러한 작가의 달항아리가 같는 고유한 조형적 특성이 독특한 심미적 이미지를 생성한다. 생성과 소멸의 반복이 달항아리의 표면의 질감과 빙열의 선들을 통해 펼쳐진다. 관객은 우주를 가득채우고 있는 무한수의 입자들 가운데 하나에 빙의한다. 인간의 자의식은 사라지고 작가의 이미지에 흡수되어 버린다. 무한히 증가하는 짧은 선의 반복은 한국 현대미술의 모노크롬 스타일의 회화와 노장철학에 바탕한 명상적 회화와 연결된다.

깊은 성찰과 명상 가운데 우리는 가시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화가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화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회화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회화 이미지는 설명적인 세계에서 상징적인 세계로 나아간다. 관객은 거꾸로 상징적인 세계에서 설명적인 세계로 이동한다. 화화 작품 속이 상징으로 집약되어 있다면 회화 밖은 설명으로 채워진다 최영욱 작가의 이미지는 모방과 재현의 이미지가 아니다. 상징의 이미지이다. 실재성으로 수렴하는 이미지이다.

달항아리가 표현하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어떤 영감과 통찰을 불러일으킨다.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시리즈가 처음 등장한 이후 변함없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이다. 이 사로잡힘의 경험이야 말로 현대 회화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강력한 감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으로도 우리는 달항아리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기이한 떨림, 교묘한 숭고미를 온전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4 회화 이미지는 구체적인 감각의 결정체이다. 초감성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개념과 담론으로 이미지의 존재론적 근거를 간과하거나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경험의 고유성의 한 작가의 회화의 미학을 구성하는 기초이다. 20세기 이전 한국의 전통 미술인 조선의 미술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의 미학자 고유섭(1905~1944)의 미학적 탐구와 표현들은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시리즈가 어떤 미학적 성찰의 역사 속에 기원을 두고 있는 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나는 지금 조선의 고미술을 관조하고 있다. 그것은 이 땅의 생활력의 잉여잔재가 아니요, 누천년간 가난과 싸우고 온 끈기 있는 생활의 가장 충실한 표현이요, 창조요, 생산임을 깨단고 있다.(고유섭, 아포리스맨 전집) ” “---온아(溫雅)하고 단아(端雅)하나 색채적으로 대채적이어서는 아니 된다. 즉 멋쟁이여선 안된다. 질박(質朴), 담소(淡素), 무기교의 기교라야 한다. 색채적으로 조선은 다른 모든 나라에 비해 매우 단색적이다. 이것은 적조미의 일면으로 나온다. 적조미는 사상적으로 탐구해 얻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요 생활적으로 육체와 형랙을 통해 얻는 커다란 성격의 하나다.(고유섭, 고선 미술문화의 몇 낟 성격. 조선일보, 1940)”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이미지도 고유섭이 평한 조선미술의 미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조선의 백자와 회화에 대한 고유섭의 해석과 미적 표현들은 최영욱 작가의 회화에도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부를 살았던 고유섭의 시대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그 이후 변화한 세계와 문화의 전반적인 영향을 고려해보면 최영욱의 회화가 단순히 과거의 미적 전통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의 변화에 상응하는 미적 감각과 사유를 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최영욱의 회화는 과거 한국의 미적 전통과 연결되지만 동시에 20세기 서구예술의 전통 속에 발전해온 현대예술의 회화의 변화가 보여준 이미지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특히 밀레니엄 이후 지난 20여년간 한국현대미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조 또는 스타일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모노크롬 회화인 단색화와의 영향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최영욱 작가의 회화를 특성을 이해하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 한국 미술계에서 이미지의 문제는 서구의 흐름과는 다른 문제를 품고 있다. 전통과의 단절과 창조적 전승의 문제이다. 한국 현대미술의 형성기에 전통 도자기에서 미의식을 발견하려고 한 도상봉과 김환기와 같은 화가들이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구상화가들이 소재로서 도자기를 많이 그렸지만 그들의 그림에서 새롭거나 영감을 주는 창의적인 미적 해석과 표현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현대미술분야에서 전통의 새로운 창조라거나 한국성의 미학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하는 주제와 관련해 대부분의 담론은 반동적인 미학에 머물렀다. 그것은 교훈적 도덕적 또는 초감성적인 차원으로 급하게 미끄러진다. 과거 조선의 문화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전혀 새로운 현대미술의 성취를 담아내지 못하는 퇴행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감각, 표현과 형식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미지는 미묘한 색감과 톤과 붓질(스트로크)과 터치가 풍부한 조형적 미감을 품고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차원의 세계가 열리는 미적 효과를 보여준다. 현대 예술에서 이미지는 “인간의 본능적 무의식을 드러내듯이 인간의 ‘시각적 무의식’을 포착하는 것이며 실재 안에서 숨 쉬는 ‘미세한 우연성의 흔적’,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비가시적인 지점’을 담고 있다.(발터 벤야민)” 최영욱 작가의 이미지는 일상의 시간의 흐름을 일시 정지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시간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더 천천히 흐르는. 그의 이미지가 명상의 시간성을 떠올리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최영욱 작가의 달항아리 시리즈에서는 매우 개념적이며 동시에 독특한 개성과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다.

5 지난 몇 년간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작가는 하얀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달항아리와 만나는, 회화와 설치가 융합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23년 서울과 런던에서 선보였고 향후 뉴욕과 도쿄, 남극 등 세계 곳곳에서 추진할 예정이다. 이는 지구생태환경의 종말적 위기를 마주해 현대예술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작가가 조성한 명상의 집은 작은 미술관이자 기도소이며, 오랫동안 작업의 주제인 ‘업(業, KARMA)’과 조우하는 장소이다. 모든 존재가 연결되는 인드라 망의 현현(Representation)을 상징하며 우주적 존재로서 한 개별자가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진정한 자기 발견의 장소이다. 이 공간에서 관조와 명상을 통해 궁극의 자아 또는 진실한 최초의 정신과 조우하려 한다. 작가는 조형미의 영역에서 이미지와 명상을 통한 자기 발견의 문제로 나아간다.

돌아보면 지난 시기 최영욱 작가는 서구예술과 한국의 전통예술의 미적 태도와 가치를 동시에 사유하며 자신의 예술세계의 독자적인 미학적 원칙 또는 준칙을 세워나갔다. 무엇보다 노장철학과 불교철학에 따른 예술과 예술가 개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세계와 전자정보사회의 미적 감각과 자연스러운 융합을 통한 통합 또는 화해를 시도한다. 생활에서는 세속적 감각과 탈속의 감각의 균형을 추구하면서 창작에서는 미적 형이상학에 기반한 사변적 경향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미지와 일상 언어의 숲 너머로 나아간다.